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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밖의 여정 『공항에서 일주일을, 히스로 다이어리』

    이번에 소개할 책은 여행 에세이다. 책 제목에서 눈치챘겠지만, 이 여행의 출발지와 도착지는 모두 영국의 한 공항이다. 우선 영국에는 총 66개의 공항이 있고(한편, 대한민국의 공항은 총 15개다) 수도인 런던에만 6개의 공항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히스로 공항(Heathrow Airport)은 시내 중심부와 가장 가깝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제일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1946년에 첫 개항을 시작으로 유럽에서는 첫 번째, 세계에서는 3번째로 번잡한 공항으로 꼽힌다. 나에게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저자로 익숙한 알랭 드 보통이 (Alain de Botton) 이 책의 작가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 에세이라니. 철학과 사랑을 주제로 한 저서로 전 세계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낸 그가 쓴 여행 에세이집은 과연 어떨지 기대 속에 읽게 된 책이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2009년 여름에 히스로 공항 관계자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히스로 공항의 첫 <상주작가>가 되어 세계에서 가장 바쁜 이 공항을 자유롭게 관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은 딱 일주일. 작가는 최신 탑승 허브인 '터미널 5'에서 공항 측에서 준비해준 책상과 의자에 앉아 일주일 간 글감을 모은다. 글감의 메인 테마는 당연히 공항에서 만난 온갖 여행자들과 공항 관계자들일 테다. 그들과 나눴던 이야기 또는 공항에서 직간접적으로 보고 겪은 일화들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여행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이 설렘 가득한 장소에서 작가의 시선은 무엇을 담았을지 궁금하여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출발 - 게이트 너머 - 도착

    책은 [접근] 챕터로 시작된다. 작가가 공항 관계자로부터 연락을 받고 승낙하기까지의 에피소드가 짧게 소개되어 있다. 그다음으로는 [출발], [게이트 너머], [도착] - 이렇게 총 3개의 챕터로 구성되어있다. 각 챕터의 이름들이 길을 찾는 여행객들을 위한 표지판 이름 같아 공항 느낌을 물씬 풍긴다.

     

    여행을 떠나기 위한 사람들로 붐비는 출발 게이트 앞. 아무래도 공항 내에서 제일 유동인구가 많은 곳일 테니, 시끄럽고 정신이 사나워서 글 쓰는 데에 집중이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작가에게는 이 출발장이 일하기에 아주 이상적인 장소였다고 한다. 글감이 되어줄 소재가 넘쳐났던 것이다. 더군다나 "상주작가"의 신분으로 한 곳에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있다 보니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작가의 말을 따르자면 "뭐라도 극적인 일이 벌어질까 기대하는 눈초리"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나 또한 이 책에서 [출발] 챕터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그 수많은 출발장 속 사연들 중에 작가의 눈에 가장 먼저 띄었던 건 여행자의 수화물이었나 보다. 작가는 "부자일수록 짐이 적어지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한다. 내가 가난한 대학생 시절 떠났던 배낭여행에 가져간 캐리어 크기를 떠올리면 그에게 반박할 여지가 없다. 당시 나의 캐리어엔 <혹시 모르니>로 분류되는 잡동사니들이 참 많았다. 그때 가져갔다가 도로 새것인 상태로 들고 온 물건들은 아직도 내 방구석에 처박혀있다.

     

    이별을 맞이한 한 커플을 묘사한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작가가 상주하고 있는 테이블 근처로 한 커플이 찐한 포옹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곧 헤어질 참이었다. 이 커플이 눈에 띄었던 건 그들이 나누고 있었던 강렬한 키스 때문. 멀리서 보았을 때는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여자는 슬픔에 잠겨 울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남자는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가 게이트 너머 비행기 탑승구로 돌아설 때 알랭 드 보통과 사진작가는 각각 남자와 여자의 뒤를 쫓아보았다. 흥미로웠던 건 이때 여자는 얼마 못가 무너지며 슬퍼했지만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만을 내다보았다. 가끔 특이하게 다리를 떠는 것 외에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우린 모두 여행자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공항에서는 모두의 신분이  '여행자'로 똑같아진다. 이 점이 공항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이 여행자의 직업이 무엇이고, 저 여행자는 어디에 사는지가 전혀 중요치 않은 곳. (물론 도착지에서 입국 심사할 때는 예외겠지만..) 그저 여행의 설렘과 즐거움으로 왠지 모르게 살짝 붕 떠 있는 그 공기. 내게 공항은 어떤 요구에도 큰 선의로 보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법과도 같은 곳이다. 더군다나 유독 영국을 좋아하는 나에게 히스로 공항을 배경으로 한 에세이는 참 큰 선물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세계여행이 모두 멈춰버린 시기에 책을 통해서라도 만난 런던의 일부는 아직도 영국스럽게 무탈한 것 같아 반갑기도 했다. 책 속에 함께 실린 공항 내부의 멋진 사진들은 유명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리처드 베이커(Richard Baker)의 작품이라고 한다. 알랭 드 보통과 함께 일주일을 상주하며 공항의 모습들을 담았는데, 사진 덕분에 책이 더욱 풍성하다. 나와 같이 영국을 좋아하지만 갈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의 책을 한 번이라도 재미있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205 page.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우리가 읽은 책, 일본의 절, 룩소르의 무덤, 비행기를 타려고 섰던 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등 모두 다. 그래서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항구를 굽어보는 방 두 개짜리 숙소, 시칠리아의 순교자 성 아가타의 유해를 자랑하는 언덕 꼭대기의 교회, 무료 저녁 뷔페가 제공되는 야자나무들 속의 방갈로. 우리는 짐을 싸고, 희망을 품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회복한다. 곧 다시 돌아가 공항의 중요한 교훈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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