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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하게 은둔할래.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이 책을 구매하게 된 건 내가 애용하는 독서 기록 어플 "플라이북" 덕분이다. 활동 이력을 통해 받은 포인트로 플라이북에서 책을 구매할 기회가 생겼다. 나는 대게 읽고 싶은 책이 생기게 되면, 중고서적을 구매해서 읽고 되팔기 때문에 빳빳한 새 책을 사는 건 매우 오랜만이었다.
플라이북 추천 카테고리에서 '30대 여성에게 인기 있는 책'을 누른다. 이제 곧 내 얘기가 될 테니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던 건 화사한 컬러감의 표지 그림이었다. 전체적으로 따스한 노란빛이 감도는 그림에는 또 노란빛 머리칼을 야무지게 돌돌 말아 묶은 여자가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여자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제야 보이는 책의 제목, "명랑한 은둔자 (The Merry Recluse)". 명랑한 은둔자? 은둔자인데 명랑할 수가 있나? 잠깐, 내가 알고 있는 '명랑'이라는 단어가 그 뜻이 맞나? 갑자기 '명랑하다'의 사전적 정의가 궁금해진다.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하다. 유쾌하고 활발하다. 정리하자면 명랑한 은둔자는 "밝고 유쾌하지만 세상일을 피해 숨어 사는 사람"을 의미하겠다. (…) 나잖아..? 정확히 말하면 내가 지향하는 바다. 나도 세상 복잡한 이런 것 저런 것들에서 벗어나 살기를 원하면서도 가지고 태어난 태생적인 명랑함은 잃고 싶지 않다. 아이와 같은 순수함 말이다. 어쩌면 이 책은 내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더 고민하지 않고 '구매하기' 버튼을 눌러버렸다.
지극히 개인적인, 그러나 모두의 것인 이야기
미국에서 정신분석학자 아버지와 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캐럴라인 냅(Caroline Kanpp)은 2002년 42세의 젊은 나이로 폐암 투병 중에 세상을 떠났다. <명랑한 은둔자>는 Caroline의 유고 에세이집으로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줄곧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예민하게 바라본 도시와 사람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책이라기보다는 일기장에 가깝다. 나처럼 혼자 살아가는 어떤 한 젊은 여성의 일기장 말이다.
일기장에는 줄거리가 없다. 당연한 거 아닌가? 그저 오늘 하루 일어난 일, 또는 요즘 느끼고 있는 감정과 생각들을 투덜대며 털어놓을 뿐이다. 다만 이 일기장 주인의 히스토리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캐럴라인은 평범한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쌍둥이 자매와 함께 자랐다. 그녀는 명문대 브라운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기자와 전업작가로 활동하지만, 20대와 30대에 자신이 겪은 여러 중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해 낸 스토리를 총 3편의 에세이로 펴냈다. 남 부러울 것 없는 지식과 외모, 작가라는 멋진 직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괴롭혔던 건 무엇이었을까? 잘 모르지만 아마 그녀의 따듯한 마음씨가 한몫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을 사회 불균형과 불평등, 평화를 위해 자신을 포함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다 보면 새삼스레 나라는 존재가 너무 작음을 깨닫는다. 개인의 존재가 세상을 바꾸기엔 너무 힘없고 하찮게 느껴질 때, 아마 거기서 오는 괴리감과 무기력함을 견디지 못하고 작가는 어둠의 늪에 빠졌을 거라 감히 추측해 본다. 이와 비슷한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이런 부정적 감정들이 결국 도화선이 되어 무언가에 의존하는 성향이 길러지게 된다. '세상이 아니라 내가 미친 걸까?' 끊임없는 자아성찰 끝에 고립에 휩싸인다. 사회에 만연한 젠더갈등과 기후위기, 지긋지긋한 Covid-19,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끊임없이 시끄러운 2022년의 현재, 우리도 모르게 저 밑에서 찰랑이는 그 피곤한 감정들. 자칫 불씨가 옮겨 붙지 않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고립되지 않을 수 있는 연대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에서 20년 전의 캐럴라인이 생각해 볼거리를 지긋이 던져준다.
"고독은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고립은 무섭다"
19-20page📖 고독은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고립은 무섭다. 고독은 우리가 만족스럽게 쬐는 것이지만, 고립은 우리가 하릴없이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가 늘 분명하거나 선명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두 상태가 늘 배타적인 것도 아니다. 고독은, 내 경험상, 자칫하면 미끄러지는 경사로다. 처음에는 안락하게 느껴지지만, 종종 아무런 경고도 자각도 없이 훨씬 더 어두운 것으로 변신할 수 있는 상태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워'. 몇 해 전 알 수 없는 우울감에 괴로워하던 나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하면 안 외로울 것 같지? 나도 니 아빠랑 같이 살지만 외로울 때가 많아. 사람은 그래'. 물론 엄마에게 나의 우울에 대해 얘기한 적은 없다. 몇 달을 회사 말고는 밖에 나가지도 않고 원룸에 찌그러져 있었지만, 엄마에게 나는 약속이 많아 항상 바쁜 딸이었다. 참다 참다 꺼낸 '엄마 나 외로워' 한마디에 엄마가 꺼낸 위로의 말은 "원래 다 그렇다"였다. 원래 다 그러니 그냥 참고 살라는 건가.. 엄마의 말투는 다정했으나, 워딩은 시릴 만큼 차가웠고 폭력적이었다. 역시 그 누구도 내 마음을 몰라.. 나는 방문을 더욱 굳게 걸어 잠갔고, 어느 시점부터는 자발적 고립을 즐기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원룸에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유튜브 보기. 눈이 시뻘게지고 아파올 때까지 냅다 유튜브만 봤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어느 아이돌 그룹의 '웃음 참기 챌린지 영상'. 정말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배꼽 잡고 웃었다. 너무 웃겨서 울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문득 햇빛을 쬐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바빠졌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있었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도 소중했고, 집에서 오롯이 혼자 즐기는 주말 아침의 여유도 좋았다. 이전에는 차갑기만 했던 새벽 공기가 따스이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고립이 고독이 되던 순간인가.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지인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바쁘게 산다. 약속 없는 날 혼자일 때도 하루 동안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지워가며 자그마한 성취감에 하루를 기쁘게 마무리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 사회생활이랍시고 강요되던 지겨운 막내 생활 심부름과 술자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규칙들과 편견과 불평등.. 나를 옥죄었던 사람, 사회, 세상. 빌어먹을 이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라며 대인관계를 거부했던 나를 밖으로 밖으로 나오게 만들었던 건 놀랍게도 사람들의 웃음소리, 사람들이 만든 음악,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주말 아침 혼자 마시는 커피타임을 오롯이 즐기기 위해서라도 서툴지만 타인과의 관계 형성은 반드시 필요해 보였다.
캐럴라인도 나와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강아지와 산책하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간대에 공원에 모이는 애견인 모임을 통해 인적 네트워킹을 즐기기도 했다. 긴 암흑의 터널에서 벗어나 비로소 명랑해진 그녀인데..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게 된 그녀의 삶이 안타깝다. 캐럴라인의 40대와 50대, 60대도 너무 궁금하지만 그녀의 시간은 30에서 멈춰있고, 나는 그런 그녀의 나이가 되고 나서야 캐럴라인을 알게 되었다. 지금 그녀가 건강하게 살아있었다면 명랑한 은둔자로서 60대의 캐럴라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유독 인생의 쓴 맛만을 찾아 위태롭게 흔들렸던 그녀가 그곳에서는 부디 평온하기를 바라본다. (RIP)
공감되었던 <플라이북> 리뷰 중 발췌
[비버리 님]
아니, 미국인도 다른 문화의 (아시아권의) 나랑 같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근데 쌍둥이 언니가 있어...? 그럼 교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거네.
아니 또 친구가 이렇게 많아? 역시 미국 '아웃사이더'라 해도 인싸였어.. 다르다..."
[프롬 님]
인생의 대부분을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얻기 위해 감내해야만 하는 것들, 시험을 통과하고, 지적 후프를 뛰어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여겼어. 그러니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깊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를 통해 알게 된 것이 내게는 놀라운 일이야. 이것이 네가 내게 준 선물이란다. 네 존재만큼이나 소중한 선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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