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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1959년에 출간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프랑수아즈 사강(필명)의 여섯 번째 작품으로, 당시에 작가의 나이는 고작 24살이었다. 작가의 나이가 더욱 놀랍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 책이 '중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현실적이고 섬세한 감정 묘사로 유명한 이 책이 24살 푸릇푸릇한 청년 작가에 의해 쓰인 책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18살의 나이에 『슬픔이여 안녕』으로 문단에 등단하여 그해 문학 비평상을 받고 작가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어린 나이에 거둔 성공이 그녀에게 독이 되었을까? 그녀의 삶은 한 마디로 폭주하는 기관차와 같았다. 일찍이 배운 담배와 술, 온갖 나쁜 것들에는 다 중독되고, 스포츠카로 과속 운전을 즐기다가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던 프랑수아즈 사강. 심지어 그녀는 말년에 탈세 혐의로 금고형을 받고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한다. 2004년 심장과 폐질환으로 병을 앓다가 69세의 나이에 숨을 거둔 그녀.
그렇지만 사강(Sagan)의 장례식은 국장급으로 치러졌을 정도로 프랑스 사람들에게 프랑수아즈 사강은 미워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 같다. 일례로 그녀가 1995년 약물 소지 혐의로 체포될 당시, 그녀는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J'ai bien le droit de me détruire)."라며 자신을 변호했고, 이후 선고유예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장례식 당시 대통령이 직접 애도를 표할 정도로 프랑수아즈 사강이 프랑스의 국민적 지지를 받는 작가였음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청춘의 끝은 이별이 어려워질 때
이 책의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파리에 사는 폴(Paule, 39세)이 바람기 많은 오래된 연인 로제(Roger, 40세)와 폴에게 푹 빠져버린 젊은 남자(Simon, 25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익숙함에 안주하고 마는 중년의 사랑 이야기다. 작가는 세 사람의 직설적인 대화 형식을 빌려 등장인물들의 얽히고설킨 감정의 고리를 묘사한다. 줄거리만 보면 막장 드라마가 예상되지만, 결말은 각성 효과가 있었다. 캐릭터 설정이 아주 확실하다 보니 매 장면을 읽고 상상해내기 아주 쉬어, 책을 읽는 동시에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준다.
폴(Paule)은 파리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이다. 그녀에게는 5년을 함께한 동년배 연인 로제(Roger)가 있지만, 로제는 폴에게 집중하기보다는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며 시도 때도 없이 바람을 피운다. 폴은 자신에게 헌신하지 않는 로제의 자유분방한 태도가 불만이면서도 로제와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데, 아마도 폴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폴은 인테리어를 의뢰한 한 부인 집에 들렀다가 그 부인의 아들인 시몽(Simon)을 만나게 된다. 시몽은 25살의 젊고 잘생긴 변호사인데, 그는 폴을 본 순간 첫눈에 반해 그 뒤로 폴을 따라다닌다. 어느 일요일 오후 시몽은 폴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 편지를 받고 난 후 폴은 시몽과의 데이트를 기대하기보다는 '브람스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대한 생각에만 집중할 뿐이다. 자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브람스의 음악 스타일이 어떤지, 평소에 음악 연주회에 가는 것을 즐겼었는지, 그녀는 과연 무얼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등등 생각이 꼬리를 물기만 할 뿐이다.
끈질긴 시몽의 구애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폴은 로제를 기다리다 지쳐, 끝내 시몽을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와 살게끔 허락한다. 시몽은 아침 일찍 일어나 폴을 위한 아침 식사를 차리고, 자신의 무얼 하게 되든 폴에게 이야기하며 조언을 구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폴은 시몽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행복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불편함을 느낀다. 한편 로제 역시 익숙한 폴의 곁을 떠난 뒤로 불면증에 시달리며 폴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때다. 결국 얼마 지난 뒤 폴과 로제는 다시 서로를 찾게 되지만, 폴은 구원을 받은 기분과 길을 잃은 기분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며칠 뒤 아파트에서 짐을 모두 챙겨 나서는 시몽에게 폴은 슬픔에 젖어 이렇게 말한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끝내 익숙한 상대에게 안주하려 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늙은이처럼 느껴졌던 폴의 슬픈 외침이었다.
폴과 로제가 다시 서로의 품으로 돌아온 후 어느 날 저녁, 폴의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로제가 말한다 -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이렇게 또 로제는 서툰 거짓말을 반복하고, 폴의 상처 입은 저녁 시간도 다시 되풀이된다. 이제는 상처와 갈등도 너무 익숙해져 버린 그들은 이것 또한 '사랑'이라 칭하며 그 안에 머물고 만다.
'…' 말줄임표가 주는 의미
이 책의 제목은 신기하게도 물음표로 끝나는 질문형이 아닌, 말줄임표로 끝나는 애매한 권유형 문장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시몽이 폴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며 쓴 편지의 글귀다. 여기서 말줄임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브람스라는 작곡가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스승의 부인(클라라 슈만)을 평생 동안 짝사랑해왔던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클라라 슈만과 브람스의 나이 차이는 14살. 시몽과 폴의 나이 차이도 14살인 것을 생각하면, 시몽이 하필 '브람스 연주회'를 고른 것이 우연은 아닐 테다. 그러니 그의 편지에는 미묘한 장난기를 담아내면서도 폴이 자신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줄지에 대한 불확실함을 함께 표현할 수 있는 '말줄임표'가 필요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폴이 이 편지를 받아들이는 심리 묘사를 '…'에 모두 담아내지 않았을까 싶다. 깊이 생각지 않는다면 그냥 기분 좋은 데이트 신청으로 볼 수 있을 이 문장을 읽은 후, 폴은 왜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녀는 39살의 나이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지 두려워하면서도, 젊은 남자가 본인을 끊임없이 유혹해대는 이 상황을 그저 지켜만 보는 연인 로제에 대한 원망 때문일 것이다.
결국 사랑(또는 행복)의 기회 앞에서 뒤돌아서며, 익숙함에 안주하고 마는 폴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보자. 우리가 삶의 어느 시점에서라도 새로운 기회 앞에 항상 열려 있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제목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잘 드러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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