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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사람은 반드시 함께여야 한다.

    1-1. 상담의 시작

    무료 상담 체험의 첫 번째 회기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상담소에 너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근처 버거킹에 들러 아이스크림과 치즈스틱을 먹다가 약속 시간보다 2분 정도 늦게 들어갔다. (맛있었다..)

    미리 작성해간 설문지를 꺼내어 선생님께 드렸다. 10회에 걸쳐 진행될 내 상담 테마는 대인관계다. 특히 직장 내 상사와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기로 하였다. 공사 구분 못하고 무례한 말을 내뱉는 상사 때문에 내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들을 이해해보고도 싶다.

    선생님께서는 3-4회까지 질문이 엄청 많을 거라 하셨다. 아마 선생님께서 나를 파악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OO님, 오늘 저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나의 안부와 하고 싶은 이야깃거리를 물으며 상담이 시작되었다.

    1-2. 용기

    “선생님, 저 이직하기로 했어요.”
    “오??? 일주일 사이에 뭔가 큰 결심이 있으셨나 보네요? 지난주 중 언제쯤 마음을 먹으신 거예요?”

    선생님께서 꽤나 크게 놀라셨다.

    “사실 마음먹은 건 꽤 되었고, 퇴사를 통보한 것은 지난주 화요일이었어요. 그리고 오늘 여기 오기 직전에 사직서를 내고 왔고요.”
    “오호. 어떤 마음이 들어 퇴직을 결심했을까요?”

    나는 내 입으로 다시 내뱉기도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쭈욱 읊었다.

    “그냥 참고 다녀보려고 했지만, 반복되는 고문에 혼자 끙끙대고 있을 제 모습이 안쓰러워서요. 무엇보다 제가 겪었던 일들을 털어놓았을 때, 저보다 더 크게 화를 내준 친구들과 부모님 덕분에 이직을 결심할 수 있었어요.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로부터 용기를 얻었던 것 같아요.

    어느덧 자취한 세월이 거의 10년이 다 되었다. 아니지. 고등학교 때도 거의 기숙사에 살았으니까 정확히 하자면, 나는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지 올해로 13년 차다.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그날 있었던 일과 그때 느꼈던 감정을 혼자 곱씹고 성찰해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웬만한 어려운 일들은 남에게 얘기하기보다 혼자 삭혀왔다. 난 그게 바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딱히 해결하지 못한 채 마음 한편에 쌓아두기 시작했던 것들이 마음 한가운데까지 자리 잡고는 독이 되곤 한다. 그것은 오히려 나를 참고 인내하는 독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누군가 내밀어주는 따듯한 손길과 나를 이용하려고 내미는 손길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야 만다.

    서로 알게 된 지 이제 3개월 정도밖에 안된 팀장이 나에게 던진 쓰레기들이 수면 위까지 찰 때쯤 되어서야 나는 위험 감지 신호를 느꼈다. 그래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엔 털어놓았다. 친구에게, 엄마에게. 물론 하소연 늘어놓아서 미안하다며 (다소 자기 비하적인) 용서를 구하는 말로 마무리했지만..
    “미친! 야 신고해! 그거 신고감이야!”
    “내일 당장 가서 사직서 써. 그 자식한테 가서 당신 무례하다고 단단히 혼내고 일러줘.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나와버려!”
    나를 위해 기꺼이 분노해주는 사람들. 두 시간이 넘도록 전화기를 붙잡고 내 감정을 헤아려준 고마운 사람들. 사람은 절대 혼자 살 수 없다. 반드시 함께여야만 한다.

    2. 상담을 통해 깨달은 것들: 놀라움의 연속

    2-1. 인턴 이야기

    몇 개월 전쯤 회사에 정직원 전환 가능한 인턴십 프로그램이 오픈되었다. 업계에서 워낙 신규 인원을 뽑는 일이 없다 보니 많은 지원자가 몰렸고, 그중 우리 센터에는 3명의 인턴이 배정되었다. 이 3명 중 단 1명만 정직원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인턴 셋 중 A는 현란한 PPT 제작과 발표 능력과 깔끔한 일처리로 AI라는 별명을 가졌다. B는 잘 웃고 실없는 얘기도 서스름 없이 할 줄 아는 여유 있는 친구였다. 그리고 존재감이 적었던 C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안쓰러웠던 기억..) 결론부터 말하자면 B가 정직원이 되었다. 그리고 A는 6-7년 전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인턴들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어요?”
    “그 A라는 친구에게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꼭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살다 보니 능력보다는 잘 쌓아놓은 대인관계의 힘이 더 크더라’고요.”
    “A라는 친구에게서 인턴 시절의 본인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나요?”
    “네. (웃음) 지난 6년간 회사에서의 제 모습을 쭉 돌아보았어요. 제 딴에는 상사를 배려한답시고 업무를 축소 보고 했었거든요. 그게 능력이라고 생각했어요. 힘들어하지 않고 무탈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요. 생각해보면 상사가 원하는 건 묵묵하게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그리고 저도 꾹 참고 일하다 보니 업무가 과중되어 쉽게 번아웃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요.”
    “OO님은 상사분을 배려해서 묵묵히 일하셨다고 했는데, 반대로 그 상사분은 과연 어떤 후배를 원했을까요?”
    “음… 일도 잘 하지만 편하게 와서 말 걸어주는 후배?”

    (순간, 내가 말하고도 흠칫했다.)

    “그럼 OO님은 미래에 어떤 상사가 되고 싶으세요?”
    “아… 사실 저도 일만 잘하는 상사가 아닌 후배들과 소통하고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같아요.”

    “OO님은 섬세하신 분이니까 나중에 상사가 되면 후배들과 친하게 잘 지내실 것 같아요. 마음이 따듯한 분이시니까요.”
    “... 제가요?”
    “네. 관찰력과 통찰력이 좋으신 편이에요."

    (선생님께서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관찰을 잘한다는 건 신중하다는 것이고, 신중하다는 건 무례하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신중하고 무례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통찰의 시선도 가지고 있다.)

    “오, 제가 그렇군요.. (멋쩍음)”

    2-2 ) 트라우마

    “OO님, 궁금한 게 있어요. 이직을 결정하시고나서 지금까지 OO님의 마음 상태는 어때요? 어떤 감정을 가장 많이 느껴요?”
    “사실 사직서를 내면 후련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동시에 찝찝해요. 제가 문제에 당당하게 맞서지 않고 회피하는 건 아닌지…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것은 아닐지… 머릿속이 복잡해요.”
    “흠, 그럼 후련함과 찝찝함이 OO님 마음속에서 몇 대 몇 정도의 비율일까요?”
    “50:50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오, 찝찝함의 비율이 꽤 높네요. 그럼에도 이직을 결심하신 걸 보면 후련함이 51로 이겼다고 봐도 될까요?”
    “네. 참아야만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버티겠지만, 선택이 가능한 상황이잖아요? 우선 계속 괴로운 사건들이 반복될 것 같다는 생각에 무서웠어요. 트라우마처럼요. 회사에서 일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을 텐데, 말 같지도 않은 말로 저를 상처 주고 자기 멋대로 저를 평가하는 그 사람이 너무 싫었어요. 그 와중에 어디에도 말 못 하고 혼자 낑낑대고 있을 제 모습을 상상하면 너무 힘들고 어두워보여서, 후련함에 무게를 더 실은 것 같아요.”

    “트라우마를 잘 말씀하셨어요. 정말 통찰력이 좋으시네요. ‘똑같은 상황에 또 놓일까 불안해한다’. 그게 정신적 외상을 경험한 사람의 심리적 반응이거든요.”
    “아… 제게 트라우마가 생긴 건가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OO님은 그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잘 선택하신 것 같아요. 자극을 받는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장 직접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죠.”
    “오호.. 그렇지만 부딪히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계속 피해 다닐 순 없잖아요. 문제 해결이 아니라 도피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맞는 말이에요. 어디서든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죠. 하지만 문제에 직면해서 해결될 일들은 트라우마를 겪을 정도로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아요."

    2-3) 나도 몰랐던 나

    “제가 봤을 땐 이번 이직이 OO님의 불안한 감정을 해소해주는 좋은 방법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혹시 지금 계신 직장이 연봉이나 복지 수준에서 훨씬 좋기 때문에 찝찝해하시는 것도 있을까요?”
    “아니요. 과거엔 지금 직장이 업계 내에서는 몇 손가락에 꼽는 탑티어 중 하나였어요. 그 시절부터 쭉 근속해오신 분들은 이곳이 아주 좋은 회사라고 생각하시죠. 사실 지금은 딱히 그렇지도 않은데 말이에요. 과거의 영광에 취해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럼 소위 탑티어라 불리던 직장에서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진 않을까요?”
    “아니요. (단호) 저는 성장은 어디서든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대목에서 선생님은 폭풍 필기를 하셨다.)

    “저의 배움이 멈췄다고 하더라도, 저의 지식을 후배들과 공유하고 가르치면서 얻는 성취감이나 뿌듯함도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 나는 함께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나는 분명 혼자이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OO님은 독립적으로 혼자 일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며 일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군요. 그래서 OO님과 소통이 안되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힘들었을 수도 있겠어요. OO님은 지금까지 총 몇 명의 상사를 모셔왔어요?”
    “직접적으로 일을 같이 한 건 네 분이에요.”
    “그럼 그 네 분과의 관계가 모두 어려웠나요?”
    “아니요. 어렵고 불편했던 상사는 주로 저를 평가하시는 분들이었어요. 인사고과 평가요.”
    “오… 또 통찰력이 발휘되었네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나를 점수 매기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 앞에서는 행동과 말의 제약이 많아지겠죠.”
    “네, 맞아요.”

    “지금 시점에서 과거로 잠시 가볼게요. 관계가 좋지 않았던 상사와 OO님이 나눈 대화를 떠올리면 지금은 어떤 생각이 드나요?”
    “음, 그때 당시 저의 행동과 말은 제 기준에서 바라본 ‘후배의 바람직한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그냥 업무 면에서 부족하더라도 힘들면 힘들다고 털어놓기도 하고, 상사분께 조언을 구했어도 되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러면 오히려 안쓰러워서라도 더 챙겨주셨을 것 같아요. 우직하게 일만 하는 직원은 당연히 신경이 안 쓰이겠죠.”
    “너무 좋은 답변인데요?”

    3. 마무리: 퍼스널 브랜딩

    3-1. 나의 장점에 집중하자

    상담이 끝나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관계와 소통을 중요시하고, 꽃 한 송이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다. 단지 못된 사람을 운 나쁘게 두 번이나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나는 어떠해야 할까? 선생님께서 문제없다고 했으니 이대로 살던 대로 살면 되는 것일까?

    요즘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말이 여기저기 자주 보인다. 어려운 말은 아니다. 어떤 한 분야의 대명사가 되는 것. 말 그대로 나를 브랜드화하여 사람들이 그 분야에서 만큼은 나를 찾게 하는 것이다. 나를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에 대한 SWOT (Strength, Weakness, Opportunity, Threats) 분석이 필요하겠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의 어떤 점을 어필할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학부시절 배운 좋은 기획서를 쓰는 이론적 방법과 비슷하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자신의 약점과 위협요소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물론 약점을 보완하고 위협요소를 제거함으로써 긍정적 효과를 기대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약점과 위협요소가 매우 치명적이거나 고치기 쉽지 않을 경우엔 오히려 독이 된다. 이럴 땐 자신이 가진 강점을 더욱 살리고 좋은 기회를 탐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세상에 약점과 위협요소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선배인데 좋은 후배이기도 하고, 능력도 뛰어난데 모든 사람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돈도 잘 벌면서 베풀 줄도 아는 (마치 유니콘 같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내가 도저히 자신 없는 부분은 과감하게 던지자. 이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리고 더 집중할 수 있는 것에 에너지를 쏟자. 그게 더 나다우면서도 잘 팔리는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다. 이것저것 다 욕심내고 건드렸다가는 진짜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다. 항상 과욕은 금물이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사적인 이야기는 회사에서 절대 꺼내지 않기로 다짐해왔었다. 당한 게 많다 보니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감추려다 오해가 쌓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앞으로는 나의 어떤 모습이던 자신 있게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내가 가진 장점들을 무기로 특정 분야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겠다. 그게 이제부터 나만의 사회생활 룰로 정했다.

    상담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심심해서 인스타를 열었다. 상담 전까지만 해도 나는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스타 속 각 분야의 인플루언서들이 선망의 대상이면서도 질투의 대상이었고, 구경하는 내내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이제는 놀랍게도 질투의 마음이 사라졌다. 너는 너, 나는 나. 우리는 각자 다른 장점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하루가 후련하고 뿌듯하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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